1.
과제에 치여 죽으려하는 린을 위해서 잠시 짬을 낸 하랑은 낯선 거리로 차를 몰았다. 아직 익숙해 지지 않는 거리에 상가일지라도 먹거리나 괜찮은 펍 정도는 알고있다. 약간 낡은 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멈춘 곳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네의 깔끔한 식당이었다. 메뉴판을 보고 대충 주문을 마친 하랑은 빈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것이 포장되기를 기다렸다. 유니폼으로 셔츠와 하반신을 두른 검은 앞치마를 입은 알바중 한명이 다가왔다. 어쩐지 반들거리는 검은눈과 시선을 빼앗겼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주문하셨냐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주억이자 그가 들고있던 행주로 테이블을 닦아주었다. 그가 상체를 숙이며 턱선이라던가 목덜미가 보였다. 살짝 내비치는 살갗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그가 뒤돌아 가기 전에 간신히 읽어낸 명찰에는 티엔이라고 적혀있었다. 티엔. 티엔.. 수면 위로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느낌으로 혀 끝에서 터지는 이름이 느낌이 좋았다.
린은 달콤한 조각케잌을 보며 살찌겠다고 푸념했지만 하랑은 듣는둥 마는둥 멍하니 포장을 뜯고 크게 한입 집어넣었다.
2.
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교내식당이야 그럭저럭 먹어줄만 했지만 과자나 빵은 시내까지 차를 몰고 가서 사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부턴 군소리는 붙여도 말하기 전부터 자신이 자처해 다녀오는 하랑이 아닌가. 게다가 언제나 포장지에는 같은 과자점 이름이 쓰여있었다. 학기초에 잘못사귀어 코가 꿰인 친구놈이 새삼 걱정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무용과 루시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툭 던졌다. 거기 좋아하는 알바라도 있나보지.
벌써 하루에 두번째, 예쁘게 묶인 크림색 레이스끈 리본을 바라본 린이 멍하게 되물었다. 또? 아까는 분홍색이더니 이번엔 색이 다르네- 같은 감상을 던지는 루시의 태평함이 얄미웠다. 그렇게 먹다간 또 살 찔거야 루시! 얼마 전 울상을 지으며 주변까지 힘들게 하는 다이어트를 했던 루시를 기억하는 린이 잔소리를 했다. 하랑의 너도 어서 먹으라는 눈초리에 결국 자신도 하나 집어들었지만. 맛은 있다만. 린은 입안이 온통 달콤하게 차오르는 마카롱을 먹으며 하랑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
"응."
대답 하나는 아주 쌈빡하게 잘도 하네.. 린의 불안한 마음도 모르고 즉답하며 슈크림을 우물거리는 하랑이었다. 군것질거리에 이끌려왔던 여자애들이 친구의 연애 이야기에 꺅꺅 거렸다. 그 소리에 이제 막 점심 메뉴를 받아온 이글과 마틴이 옆자리에 끼어들었다.
"오올~ 이하랑 애인? 예쁘냐?"
"반짝반짝해."
얼씨구. 하랑이 평소에 입버릇처럼 넣던 추임새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깔있기로 유명한 이하랑이 무려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기 때문이었다. 꼬맹이한테 봄이 왔다며 군소리하던 이글이 기어이 옆구리를 꼬집히는걸 바라보던 마틴이 스파게티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야?"
"티엔."
"티엔? 그거 독특ㅎ, 큽, 뭐라구..?!"
이글과 마틴은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하다 먹던 면을 코로 뿜어내고 말았다. 하랑이 질색하며 몸을 젖혔다. 그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여자애들 중 루시가 제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잠깐만.
"야, 니네 드러워."
"남자야??!!?!?"
" 응."
3.
허옇고 샌님같고 머리스타일도 웃기다, 웃는걸 못봤다,느니 하는 이글의 말은 코로 듣는지 무의미한 포크질로 조각케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게면서 정작 하랑의 눈은 문제의 알바에게 꽃혀있었다.
"아. 눈 마주쳤어!"
"아 그러세요오~? 나도 몇번이나 마주쳤지만 반응도 없거든?!"
"널 보는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아이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게에 온통 여자 뿐인데 남자는 저들 뿐이었다. 앤티크형 인테리어에 달콤한 스윗츠 전문 제과점. 남자 셋이 조그만 테이블에 모여앉아서 이러고있다고 자각한건 마틴뿐이었다.
"우리 굉장히 여자애들 같지 않아? 대화 내용이나, 케잌이나..."
"이게 누구 때문인데!"
"하랑, 그거 안먹으면 내가 먹어도 될까?
"어, 그래."
"넌 그 니길거리는게 더 들어가냐. 그러고보니 너 때문이었구나, 그러고보니 니가 케잌 같은거 시켰잖아 이 자식아..!"
티엔은 오늘도 레스토랑이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4.
이글은 마틴이 조각 케이크를 무려 6조각이나 해치우는걸 실시간으로 바라보았다. 와..마틴 챌피그, 너 진짜 대단하다.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래절래하는 이글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마틴이 경건하게 포크를 내려놓자 하랑이 반짝이는 눈으로 마틴 앞에 바짝 당겨앉았다. 이글은 궁금증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이러고있지 않았을거라며 마틴을 재촉했다. 아, 그래서 어서 그인간에 대한 것좀 어서 털어놔봐. 그랬다. 하랑이 매일 제과점에 출근 도장을 찍게 만든 티엔 정은 무려 마틴의 과 선배였던 것이다. 마틴은 만족스럽게 차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이름은 알다시피 티엔 정, 중국 국적의 유학생인데 과제가 징글맞게 많기로 유명한 이쪽 경제학과에서 지금까지 무려 올 에이쁠을 자랑하는 전설이자 독종의 표상이라나. 이글은 이 대목에서 입을 쩍 벌렸다. 미친 그게 사람이야? 그 말에 마틴이 분기탱천해서 외쳤다. 그게 사람이겠어?! 우연히 팀 프로젝트를 같이 한적이 있는데 얼마나 쪼아대던지 팀원들 스케쥴 하나하나까지 관리하려고 들더라니깐! 나중엔 나더러 군것질을 줄이지 않으면 살이 쪄서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전력질주를 해도 안될거라는 악담까지 했다고! 이글이 하랑에게 속삭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덕분에 졸업도 하기 전에 국제무역회사-마틴이 들어가고자 하는 곳이다-그랑플람에서 러브콜을 받아 인턴 생활까지한 엘리트라고.
한참 티엔의 독종일화를 듣던 이글이 물었다. 아, 제일 중요한걸 이야기 안했잖아! 그녀석 게이야? 신나게 조잘거리며 티엔의 이야기-뒷담-을 하던 마틴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사실, 엄청 많은 여자가 대쉬했었는데 한번도 티엔이랑 잔 사람이 없어. 헐! 뭐야 그럼 가능성 있는거 아냐?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남자가 대쉬했는데... 했는데? 여자한테는 그나마 좋게 거절하더니 남자한테는 그딴거 없이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니깐. 어쨌는데? 물론 그 녀석이 술 취해서 너 호모냐고 하면서 더듬어대면서 자기랑 침대로 가자고 꼬신게 문제긴 했지만, 그녀석, 거기를 확~ 차였어. 히익. 같은 남자라면 그럴순 없는거 아니냐... 그리고 언제는 한번 근처 갱녀석들이랑 시비가 붙은적 있는데, 와... 티엔은 분명히 소림사 출신이거나 중국 마피아일거야. 야 마틴, 그건 너무 멀리간거 아니냐. 아니야! 진짜 총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했어! 막 진짜 날라다녔는걸, 영화처럼. 이하랑 너 좀 위험하지 않겠냐?
가만히 듣기만 하던 하랑이 베개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멋지다.